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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자에서 폐위된 경우카테고리 없음 2024. 2. 24. 15:48
조선왕조 초기 세자책봉의 불만으로 일어난 제1차, 제2차 왕자의 난으로 왕위에 오른 태종 이방원은 다음 왕권을 물려받을 세자 책봉에 있어서는 유교적 질서에 의해 장남인 양녕대군을 세자에 책봉한다. 그러나 양녕대군이 왕세자로서 갖추어야 할 학문과 교육보다는 사냥과 놀기를 좋아하게 되는데 이런 품행은 태종 이방원으로 하여금 세자에서 폐위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었다.
양녕대군 세자에서 폐위되다.
양녕대군의 이름은 이제(李禔). 자는 후백(厚伯). 태종 이방원의 장남이고, 어머니는 여흥 민 씨로 민제(閔霽)의 딸이며, 부인은 광주 김 씨(光州金氏)로 김한로(金漢老)의 딸이다. 양녕대군은 1404년(태종 4) 왕세자로 책봉되었다. 그러나 자유분방하고 호탕한 성품의 소유자였기 때문에 왕세자로서 지녀야 할 예의범절이라든가, 딱딱한 유교적인 교육이나 엄격한 궁중 생활에 잘 적응하지 못하였다. 오히려 남몰래 궁중을 몰래 벗어나서 사냥을 하는 등의 자유분방한 풍류 생활을 더 즐겼다. 이와 같은 품행은 부왕인 태종의 눈에도 너무나 걱정스럽게 비쳤으며, 엄격한 유학자들에게도 비판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 태종은 몇 차례 군왕으로서 지녀야 할 덕행을 닦도록 잘 타이르기도 하고, 때로는 심한 벌을 주기도 했으나, 끝내 부왕의 요구에는 절대적으로 부응하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결국 1418년에 유정현(柳廷顯) 등의 청원으로 폐위되고, 왕세자의 지위에는 동생이며, 뒷날 세종이 된 충녕대군(忠寧大君)이 책봉되었다. 그런데 양녕대군이 왜 그러한 파격적인 행동을 했으며, 세자의 지위를 잃게 되었는지 아직까지 자세히 알려져 있지 않다. 동생인 세종이 즉위한 뒤에도 세종과 매우 각별했고 우애가 깊었다고 한다. 그러나 과거의 왕세자였고 현재 왕이 동생이라는 점 때문에, 일거일동이 세밀한 관찰의 대상이 되어 번번이 그것도 수십 차례에 걸쳐 탄핵되었다. 하지만 세종의 각별한 배려로 처벌을 받은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이러한 특이한 생애는 후세 사람들의 많은 사랑을 받았던 듯하며, 재미있는 일화도 많이 있다. 특히 시와 서에 능하였다. 시호는 강정(剛靖)이다. 슬하에 아들 셋과 딸 넷을 두었다.
충녕대군이 세자가 되다.
원래 태종 이방원의 뒤를 이을 왕세자는 양녕대군(讓寧大君)이었다. 그러나 양녕대군이 개와 매[鷹]에 관계된 사건을 비롯해, 세자로서의 품위를 손상시킨 일련의 행동과 사건들로 인해 태종의 다음 왕위에 대한 선위에 대한 마음이 크게 동요되었다. 그래서 태종은 자신이 애써 이룩한 정치적 안정과 왕권을 이어받아 훌륭한 정치를 펴기에 양녕대군이 적합하지 못하다고 이미 판단하였다. 태종의 마음이 이미 세자 양녕대군에게서 떠난 것을 알게 된 신료(臣僚)들은 그를 폐위할 것을 청하는 소(疏)를 올려 양녕대군을 세자에서 폐하고 충녕대군을 왕세자로 삼기에 이르렀다. 이때 태종에게는 왕후 민 씨 소생으로 양녕 · 효령(孝寧) · 충녕 등 세 대군이 있었고, 양녕대군에게도 두 아들이 있었다. 따라서 그를 폐하고 새로이 세자를 세우는 일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기 때문에 세자 폐립에 관해 의론이 분분하였다. 일설에 의하면 양녕대군은 자신보다 똑똑하고 학문이 깊은 동생 충녕대군에게 세자의 자리를 물려주려고 했다는 의견이 있다. 태종에게는 정부인의 소생으로 4명의 아들이 있었다. 양녕대군이 세자에서 폐위대면 다음 순서는 둘째인 효령대군이 순서인 것이다. 그렇지만 그는 동생인 충녕대군과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였고 왕권도 양보할 의지가 있었던 것이다. 아버지 태종은 왕권을 위해 형제들 간에 피를 흘렸으나 아들들은 이와 달랐던 것이다. 또한 양녕대군은 부왕인 태종의 마음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태종의 마음은 이미 셋째 아들인 충녕대군에게 쏠려 있었다. 1418년 6월에 태종은 “충녕대군은 천성이 매우 총민하고, 또 학문에 탁월하고 정치하는 방법 등도 너무 잘 안다.”라고 해 세자로 책봉하기로 결정하였다. 이처럼 충녕대군에 대한 세자책봉은 태종의 뜻에 따라 극적으로 이루어졌다. 물론, 대부분의 신하들도 이를 환영하였다. 두 달 뒤인 1418년 8월 10일 태종의 선위를 이어받아 세자 충녕대군이 왕위에 올랐으니 이 사람이 우리나라 정치사에서 가장 위대하고 빛나는 세종인 것이다.
세종의 빛나는 업적
세종대왕은 우리 민족의 역사에서 가장 훌륭한 유교정치, 찬란한 문화가 이룩된 시대였다. 이 시기에는 정치적으로 안정되어 정치 · 경제 · 사회 · 문화 등 전반적인 기틀을 잡은 시기였다. 즉, 집현전을 통해 많은 인재가 양성되었고, 유교정치의 기반이 되는 의례 · 제도가 정비되었으며, 다양하고 방대한 편찬 사업이 이루어졌다. 또한 농업과 과학기술의 발전, 의약기술과 음악 및 법제의 정리, 공법(貢法)의 제정, 국토의 확장 등 수많은 사업을 통해 민족국가의 기틀을 확고히 하였다. 이 많은 일들을 주도한 인물이 바로 세종이었다. 세종은 태종이 이룩한 왕권과 정치적 안정 기반을 이어받아 이를 적극적으로 펼쳤다. 그리고 세종 4년까지는 태종이 상왕으로 생존해 영향을 주었다. 태종은 1414년 육조직계제(六曹直啓制) 주 2를 실시해 의정부 대신의 정치적 권한을 크게 제한하고 왕권의 강화를 이룩하였다. 세종은 이러한 정치체제를 이어받아 태종대에 이룩한 왕권을 계속 유지하면서 소신 있는 정치를 추진할 수 있었다. 세종대는 개국공신 세력은 이미 사라지고 과거를 통해 정계에 진출한 유자적(儒者的) 관료와 유자적 소양을 지닌 국왕이 서로 만나 유교정치를 펼 수 있었던 시기였다.
세종대왕의 가장 큰 업적은 훈민정음의 창제이다. 훈민정음의 창제는 세종이 남긴 문화유산 가운데 가장 빛나는 업적이다. 그리고 우리 민족의 문화유산 중에서도 가장 훌륭한 유산임에 분명하다. 세종은 집현전을 통해 길러 낸 최항(崔恒) · 박팽년(朴彭年) · 신숙주(申叔舟) · 성삼문(成三問) · 이선로(李善老) · 이개(李塏) 등 소장 학자들의 협력을 받아 우리 민족의 문자를 창제하였다. 이것으로 보아 이 시대의 문화 의식과 수준이 어떠했는가를 가히 짐작할 수 있다.
마무리
세자 책봉에 있어서 세종은 유교적으로 세자가 될 수 없는 위치에 있었다. 그런데 태종은 유교적 질서보다 유능하고 총민한 세 번째 아들인 충녕대군을 세자로 책봉하여 왕권을 물려주었다. 이는 우리 민족에게 너무나 다행스럽고 고마운 일이다. 세종이 없었더라면 우리 민족의 찬란한 문화유산인 훈민정음도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